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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의 자부심, 화홍문 |
최초의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의 발상지 화홍문을 아십니까?1910년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일원권 지폐 도안으로도 사용 되었던 화홍문은 화성의 시설물 중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기도 합니다. 1909년 대한제국이 한국은행을 만들기로 하고 그때 만들어진 한국은행이 주합루와 광화문과 함께 화홍문을 지폐의 도안에 사용 할 만큼 대표적인 우리의 명승지 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화홍문이 인쇄된 1원권은 1910년 12월 발행되었고 그뒤 1911년 8월에 주합루가 들어간 5원권, 광화문이 들어간 10원권이 발행됨)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화홍문은 정조임금께서 화성을 축조했던 당시의 그대로는 아니고 1922년 홍수에 파괴된 것을 1933년 복원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화홍문의 옛모습은 바로 옆의 그림을 통해서 감상 할 수 있는데 이 그림은 영국의 여류화가 엘리자베스키스(Elizabeth Keith)가 1919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1920년대에 그린 그린 그림입니다. 우리나라를 사랑했던 여인 Elizabeth Keith는 기덕(奇德)이라는 우리식 이름 까지 지었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3권 출판했습니다. 기덕(Keith)여사는 우리나라를 방문 할때 마다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났고 우리문화와 역사에 대해 깊은 인식을 하였으면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 하였습니다. 스스로 우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강인한 성품을 잘 알게 되었고 또 존경하게 되었다 라고 할 만큼 우리 나라를 사랑했던 분입니다. ![]() 사진 : 왼쪽은 1922년 우리나라를 방문 했던 독일무관이 찍은 사진, 오른쪽은 구한국은행 1원권의 모습 수원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옛 광교천)이 여름에 자주 범람하므로 1796년(정조 20) 성곽을 신축할때 아예 하천을 준설하고 남북에 각각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 상류에 해당하는 북쪽 수문이다. 성곽 내의 시설물 중 상당수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파괴되었으나 이 부분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었다.수문은 모두 7개의 석조아치로 만들어졌는데 가운데 한 칸이 약간 넓고 나머지는 아치 너비가 8척, 높이 7척 8치이다. 아치와 아치 사이는 네 개의 돌기둥을 세워 물이 잘 빠지도록 하였다. 아치 위로는 다리돌을 놓아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으로는 벽돌로 낮은 성벽인 첩(堞)을 쌓았다. 첩에는 네모난 대포 구멍을 뚫고 그 위에 소포(小砲) 구멍 14개를 뚫었다. 다리 위 북쪽 가까이에 세워진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익공식(翼工式) 건물로 수문 북쪽의 경계와 감시를 할 수 있도록 사방을 개방하였다. 사다리꼴의 높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두리기둥을 높이 세우고 밑에서 한길 되는 높이에 마루를 깔았다. 아래층은 남측의 중앙간을 개방하고 좌우 협간은 벽돌로 막았으며, 좌우 측면에 2층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두었다. 기둥머리에는 간단한 초각(草刻)을 한 초익공을 꾸몄으며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椽背天障〕으로 하였다. 지붕의 각 마루는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의 머리모양의 장식)와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북측벽에는 건물에서 약간 거리를 띄우고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그 바깥쪽에는 짐승얼굴을 크게 그려놓았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또한, 각 아치에는 쇠로 만든 살창을 설치하여 이곳으로 적이 침입하는 것에 대비하였으며, 이 수문은 좌우로 성벽에 이어지도록 하였다. 문 주변에는 동쪽으로 언덕이 이어지고 언덕 높은 곳에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그 아래로 용연(龍淵)이 있으며, 수문 위아래로는 흐르는 물 사이로 넓적한 바위가 드러나 있어 수원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이 건물은 전란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시설을 갖추는 동시에 시내를 관통하는 개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을 하였다. 또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군사적·토목기술적·건축미적인 면에서 한국건축의 걸작이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광교(光敎) 언덕을 대천(大川)이 가로로 자르며 흐르고 있어, 여름 장마 때마다 범람하는 환난이 있었다. 그래서 성을 쌓기 시작할 때에 물길을 내는 일을 먼저 하였다. 넓혀서 소통을 시키고 7간의 홍예로 된 돌다리를 하천 위에 걸쳐서 설치하였다. 그 동서로 3간은 아래 너비가 8척 높이가 7척 8촌, 가운데 한 칸은 너비가 9척, 높이가 8척 3촌이다. 7개의 안팎 홍예 사이에는 각각 좌우에 돌기둥 4개를 세웠다. 홍예가 서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잠자리 무사를 붙였다. 중앙에는 장군형 무사를 덧붙였다. 거기에 다리 놓을 돌을 깔고 다리 위 바깥 쪽에는 장대석(長臺石)을 설치하였다. 아래의 전석에서부터 다리 밑까지 높이는 8척 7촌, 다리의 두께는 1척 9촌이다. 장대는 높이 1척이고 다리는 너비가 31척 길이 95척이다. 장대 위에는 누조(漏槽)[각각 너비 1척 깊이 5촌] 7개를 설치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첩을 설치했으며, 타구는 설치하지 않았다. 높이는 5척 4촌 두께는 4척 8촌이고, 아래에는 방안 대포 구멍[사방 각 1척]을 뚫었다. 위에는 소포 구멍 14개[사방 각 7촌]를 뚫었다. 안쪽은 장대만을 두고 누혈(漏穴) 6개를 뚫었다. 동서 양끝에는 8면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이무기를 새겼다. 서쪽 기둥의 북쪽과 동쪽 기둥의 동쪽에는 짧은 담을 쌓고 전판문(箭板門)을 설치하여 동쪽 성의 길과 통하게 하였다. 다리 위 북쪽 편에 누각 6간을 지었는데, 동서로 가로 너비가 3간이고 남북으로 세로 길이가 2간이다. 모두 널빤지를 깔았는데 첩의 위로 높이 솟아나오게 하여 사면에 분합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잎을 새긴 난간을 붙였다. 난간 아래에는 벽돌을 둘러서 담장을 만들고 남쪽 한 가운데 1간을 비워서 들고 나는데 편하게 하였다. 방사(放射)하는 제도는 포루와 같다. 다리 위에서 널판지 깐 데까지 높이가 6척 2촌이다. 북쪽 분합 밖으로 물려깐 널위에는 전붕(戰棚)을 설치하였고 판문 아래에는 벽돌로 된 첩과 이어지게 하였는데, 바깥 쪽에 짐승의 얼굴을 그리고 전총안(箭銃眼)을 뚫었다. 단확은 녹색을 바탕으로 하고 진채(眞彩)는 사용하지 않았다. 대들보 위에는 회를 발랐다. 누 남쪽 다리 위의 길은 너비가 5척이고 다리 아래 7개의 홍예에는 각각 쇠로 만든 전문(箭門)을 설치하였다. 줄로 양선(兩扇)을 걸어 당겨서 교면(橋面)의 석안(石眼)까지 꿰뚫고 지나가게 하였으며, 거기에다 고리를 설치하고 자물쇠를 달았다. 문 안의 양쪽 석축은 각각 길이가 6보 높이가 4척 5촌이고, 문 밖의 석축은 각각 길이가 5보 높이가 5척 5촌인데, 위로 성의 몸체와 이어져서 전체 높이는 16척이다. 이것이 실지로 내의 동쪽과 내의 서쪽이 서로 마주 서서 휘어 꺽여 원성(元城)이 되었다. 두 끄트머리는 전붕과는 좌우로 각각 29척이 떨어져 있는데, 여기에 또 좌우의 벽돌로 된 첩 위에 타구가 셋인 여장을 설치하여 담과 이어지게 하였다. 높이는 각각 4척 4촌이고 두께는 2척 2촌이다. 더구나 1930년대, 세계 누구도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없을때, 유네스코 보다 무려 반세기나 앞서 시작된 문화유산 지키기 운동이요, 전세계 최초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곳 입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북수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수원성곽(사적 제3호) 내의 북쪽 수문이다. 일명 ‘북수문(北水門)’이라고 하며, 아래에 수문이 있고 그 위에 문루가 있다. (원문 출처) 화성 길라잡이 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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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홍문을 아십니까?

수원시내를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옛 광교천)이 여름에 자주 범람하므로 1796년(정조 20) 성곽을 신축할때 아예 하천을 준설하고 남북에 각각 수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 상류에 해당하는 북쪽 수문이다. 성곽 내의 시설물 중 상당수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파괴되었으나 이 부분은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었다.
기둥머리에는 간단한 초각(草刻)을 한 초익공을 꾸몄으며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보이는 연등천장〔椽背天障〕으로 하였다. 지붕의 각 마루는 회반죽을 바르고, 취두(鷲頭 : 매의 머리모양의 장식)와 용두(龍頭)를 장식하였다. 북측벽에는 건물에서 약간 거리를 띄우고 판문(板門)을 달았으며 그 바깥쪽에는 짐승얼굴을 크게 그려놓았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북수문은 편액에 화홍문[사인(士人) 유한지(兪漢芝)가 썼다]이라 되어 있다. 방화수류정의 서쪽 44보 되는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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