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산행정보를 얻기 위하여 책을 보거나 또는 실제 산행을 하다 보니 사찰의 창건자로 자장율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등이 눈에 자주 띄었다. ^^
또한 실제 등산 중 사찰을 지나거나 방문하는 경우에도 그렇고...

어찌 생애 집 한 채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쌓였는데, 이 분들은 살아 전국 방방곡곡, 심산유곡에 그렇게도 많은 절들을 창건하였는지 괜시리 할 일 없이 궁금해져 한 번 기록이나 해보자 생각하였다.

우선 다음 백과사전에서 이분들의 행적을 옮겨 적어 보고, 차후 산행기, 책, 실체 등산, 여행 등을 통하여 사실 확인을 하여 기록할 생각이다...
뜬금 없이 시작하였으므로 기록의 끝도 어느 때가 될 지는 모르겠다. 아마 끝이 없을 지도....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무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 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바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을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가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여왕은 자장의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만에 귀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갈磨私記)> 1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 1권, <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90년 만에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사회지도자였다.
그는 해박하고 심오한 불교 학해(學解)로 방대한 분량의 불교 관계 저술을 남겼다. 속성은 설(薛).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출가한 뒤 스스로 첫새벽[始旦]을 뜻하는 원효라고 이름지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아명인 서당의 당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서당은 '새털'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다급한 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송고승전 宋高僧傳〉에 의하면 14~15세 때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으며 남달리 영특하여 나중에 불법의 깊은 뜻을 깨달음에 있어서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시에 의하면 원효는 의상(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간 보덕(普德)에게 〈열반경〉•〈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또한 〈삼국유사〉 낭지내운(朗智來雲)에 의하면 원효가 반고사(磻高寺)에 있을 때 영취산 혁목암(赫木庵)의 낭지가 그로 하여금 〈초장관문 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 安身事心論〉을 쓰게 했는데, 원효는 그 글을 지어 낭지에게 전달하면서 글 끝에 "서쪽 골 사미는 엎드려 동쪽산의 상덕 고암 앞에 절합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는 원효가 낭지에게 사사했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 석혜공전(釋惠空傳)에는 당대의 신승(神僧) 혜공(惠空)이 만년에 항사사(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여러 경전의 소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원효는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현장(玄 : 602~664)에게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에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돌아왔다.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黨項城)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막[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땅막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았다. 비가 계속 내려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심법(心法)을 크게 깨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원효는 모든 진리를 체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불교와 일반 서민불교 사이에는 여전히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 혜공•혜숙(惠宿)•대안(大安) 등이 일반 서민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생활화시켰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지방의 촌락, 길거리를 두루 돌아다니며 무애호(無碍瓠)를 두드리고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려 일반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이처럼 서민의 교화에 나선 것은 학문적인 구법(求法)을 위한 입당을 포기한 후 심법을 깨달은 뒤이며 요석공주(瑤石公主)와의 실계(失戒)로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진다.
그는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후일 대학자가 된 설총(薛聰)이라는 아들을 두었다.
또 그가 스스로 소성거사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방편으로 보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길거리에서 대취하여 노래하고 춤추었던 것이나 대안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장판에서 동발(銅鉢)을 치면서 "대안 대안"을 외친 것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교화의 행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화상으로 돌아가 혈사(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



해동(海東)의 화엄초조(華嚴初祖)라고도 한다.
문헌에 따라 '義相'•'義想' 등으로도 표기되고 보통 '義湘'으로 통용되지만, 의상의 법손(法孫)들은 거의가 '義相'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의 저술에도 '義相'으로 표기된 것이 많다.

의상의 전기(傳記)를 싣고 있는 문헌은 〈삼국유사〉•〈송고승전〉•〈백화도량발원문약해〉 등인데 그 내용에 많은 차이가 있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속성은 김씨(金氏) 또는 박씨(朴氏)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어려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8세 위인 원효(元曉)를 만나 친교를 맺고 그와 함께 고구려 보덕(普德) 화상에게 〈열반경 涅槃經〉을 배우기도 했다.
650년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가던 길에 요동(遼東) 변방에서 고구려 군사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잡혀 있다가 겨우 빠져 나왔다.
육로를 통한 첫번째 입당의 시도는 실패하고, 661년 다시 원효와 함께 해로를 통하여 중국에 가던 중 원효는 한 고분에서 깨친 바가 있어 발길을 돌리고 의상 혼자만이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에 도착했다.

의상은 양주(揚州)에 이르러 그곳의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을 만나 관아에 머물면서 성대한 대접을 받고, 다음해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당시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새로운 화엄학풍을 일으켜 문하에 법장(法藏) 등의 제자를 두고 있었다.
지엄은 특별한 예(禮)로써 의상을 맞이하며 전날 꿈에 그가 올 징조를 보았다며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후 의상은 지엄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더욱 새로운 이치를 탐구하여 깊은 것을 끌어내고 숨은 뜻을 찾아내어 나중에는 스승을 능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에 머물면서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인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유했으며, 동문수학한 19세 연하의 법장과도 각별한 교분을 맺었다.
법장은 지엄의 뒤를 이어 화엄종의 제3조로서 중국 화엄종을 교리적으로 완성했던 인물로 항상 의상의 학식과 덕망을 흠모했다.
법장은 의상이 귀국한 후에도 그를 극찬하는 서신과 함께 자신의 저서 7부 29권을 신라 승려 승전(勝詮) 편으로 의상에게 보내어 상세히 검토하고 부족한 점을 깨우쳐주기를 청하기도 했다.
의상은 668년 지엄이 입적하기 3개월 전에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고 670년 귀국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귀국 동기는 당 고종의 신라 침공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는 신라로 돌아온 후 적극적인 교화활동을 펼쳤다.
귀국 직후 낙산사(洛山寺)에서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어 관세음보살에 기도하고 그를 친견(親見)했다고 한다.
그후 전국을 유람하다가 676년 태백산에 화엄의 근본도량이 된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것을 비롯해 많은 사찰을 세우고 각처에서 교화활동을 폈다.
원효가 저술에 힘쓰고 개인적인 교화활동을 편 데 반해, 의상은 교단 조직에 의한 교화와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헌에 따르면, 의상은 부석사에서 40일간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해 문답하고,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 태백산 대로방(大盧房)에서 행경십불(行境十佛),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90일간 〈화엄경 華嚴經〉 등을 강의했는데, 추동에서 강의할 때는 3,000여 명의 제자가 운집했다고 한다.
제자들 가운데 특히 뛰어난 1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으로 당시 아성(亞聖)이라 불리며 존경받았다고 한다.
그외에 범체(梵體)•도신(道身)•신림(神琳)•법융(法融)•진수(眞秀) 등도 의상의 법계(法系)에서 나온 훌륭한 제자들이다.
이처럼 제자들을 육성하고 사찰을 건립하는 등 실천수행을 통하여 화엄의 선양에 전념했다.